정대건 작가의 장편소설 『급류』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잊었던 기억과 묻어둔 비밀을 파헤치는 네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과거라는 거대한 급류가 현재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밀도 높게 그려냅니다.

기억은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배신하는가에 대하여.
누구나 마음속에 결코 마르지 않는 강 하나쯤을 품고 살아간다. 정대건의 소설 『급류』는 바로 그 강, 즉 과거라는 이름의 거대한 흐름이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지배하고 흔드는지에 대한 집요한 탐구서와 같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무주는 안개 자욱한 강과 좁은 인간관계로 얽힌, 비밀을 품기에 최적화된 공간이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네 명의 친구, 작가인 '나'와 교사 동우, 체육 강사 재호, 그리고 일찍이 마을을 떠난 선규. 이들의 삶은 20년 전, 또 다른 친구였던 수연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부딪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단순 실족사로 종결되었던 그날의 사건은, 주인공인 내가 고향으로 돌아와 묻혀 있던 진실의 조각들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 소설이 탁월한 점은 단순한 '누가 그녀를 죽였나'라는 범인 찾기 놀이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 즉 '기억이란 무엇인가'를 파고든다. 친구들은 모두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지만, 그들의 기억은 안개 속 풍경처럼 저마다의 형태로 뒤틀려 있다. 죄책감, 이기심, 두려움, 혹은 우정을 지키려는 이타심이 뒤섞여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편집된다.
한 조각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덧붙여진 거짓말들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 자신조차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견고한 벽이 되어버렸다. 주인공이 친구들의 기억을 하나씩 수집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흐릿한 흑백 필름을 복원하는 작업처럼 위태롭고 고통스럽다. 독자들은 인물들의 엇갈리는 진술 속에서 과연 누구의 기억을 믿어야 할지 혼란에 빠지며, 우리 자신의 기억 또한 얼마나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산물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급류』는 기억의 배신을 통해 인간관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낸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우정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던 친구들의 침묵은, 결국 서로의 삶을 서서히 좀먹는 독이 되었을 뿐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기억은, 과연 온전히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일 뿐인가.
고요한 강물 아래 숨겨진 그날의 비밀과 침묵.
소설 『급류』에서 무주라는 공간과 그곳을 관통하는 강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기능한다. 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거대한 침묵의 목격자다. 겉으로는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아래, 수많은 비밀과 욕망, 그리고 한 소녀의 죽음이 잠겨 있다. 이 강의 이미지는 작은 마을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두가 서로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의 불행을 외면하고 불편한 진실에 대해 입을 닫아버리는 '집단적 침묵'이 그들을 지배한다. 수연의 죽음 이후, 네 명의 친구들은 그날의 진실에 대해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다.
그 침묵은 깨지기 쉬운 우정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막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각자의 내면에 더 깊은 상처와 고립을 만들어내는 감옥이 되었다. 주인공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가 되었고, 동우는 안정적인 삶 속에 불안을 감추고 살아가며, 재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들의 현재는 과거의 침묵이 드리운 길고 어두운 그림자 아래 놓여 있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통해, 덮어둔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침묵 속에서 더욱 기괴한 형태로 자라나 모두를 잠식해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마을 사람들, 즉 어른들의 태도다. 그들은 아이들의 비극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로 서둘러 사건을 덮어버린다. 이는 개인의 안위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기성세대의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주인공의 귀향은 이 견고했던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내는 행위다. 그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고요하던 강물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하고, 각자의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비밀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인 동시에, 진실을 감당할 용기가 없는 공동체가 어떻게 서서히 붕괴하는지에 대한 서늘한 보고서다.
과거라는 급류는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인 '급류'는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은유다. 한번 휩쓸리면 개인의 의지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혹은 운명의 힘을 상징한다. 20년 전 그날, 네 명의 친구들은 수연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급류에 휩쓸렸고, 그 이후의 삶은 끊임없이 그 급류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급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과거는 끈질기게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현재로 흘러들어온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얽히고설킨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진실은 거대한 급류처럼 모든 인물들을 덮쳐온다.
정대건 작가는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예측 가능한 결말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밝혀진 진실은 단순한 권선징악의 구도를 넘어, 인간의 이기심과 연약함, 그리고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범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비극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고, 방관자이면서 목격자였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깊은 슬픔과 함께 서늘한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과연 과거는 완벽하게 청산될 수 있는가? 우리는 진실을 마주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과거의 급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급류』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과거의 상처를 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묵직하게 그려낼 뿐이다.
성장소설의 애틋함과 스릴러의 긴장감을 절묘하게 엮어낸 이 작품은, 우리에게 친구라는 이름의 무게와 기억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강렬한 흡인력과, 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짙은 여운을 가진, 놓쳐서는 안 될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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