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참혹한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엮어낸 소설입니다. 잊혀진 역사의 상흔을 현재로 소환하며, 기억하고 증언하는 행위의 숭고한 의미를 묻는 깊고 서늘한 울림을 전합니다.

하얀 눈에 덮인 섬, 검붉은 역사를 파고들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행위는, 소복이 쌓인 흰 눈을 맨손으로 파헤쳐 그 아래 얼어붙은 검붉은 흙을 만지는 것과 같다. 소설은 작가인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폭설이 내리는 제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인선은 스스로 손가락을 찌르는 자해로 병원에 입원했고, 경하는 그녀의 집에 남아 새를 돌봐야 하는 임무를 받는다. 눈으로 인해 섬에 고립된 경하는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평생에 걸쳐 기록하고 증언한 제주 4.3의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눈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국가적인 폭력과 침묵에 의해 덮여버린 역사의 상흔을 상징하는 거대한 은유다. 모든 것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듯한 눈의 순결함은, 그 아래에 묻힌 수만 명의 억울한 죽음과 잔혹한 학살의 역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소설 전체에 서늘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경하는 춥고 어두운 집 안에서, 인선의 어머니가 남긴 증언들을 읽으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은 단순한 독서 행위가 아니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상처를 자신의 몸으로 통과시키는 '증언의 계승' 의식에 가깝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경하를 독자와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 우리 역시 경하와 함께 낯선 제주의 방 안에 갇혀, 그 끔찍한 역사를 함께 읽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건조하게 나열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눈보라의 이미지, 새의 미세한 움직임, 차가운 방의 공기 등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가 그 시간과 공간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다.
개인의 아픔(인선의 자해)이 거대한 역사의 아픔(제주 4.3)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도입부는, 이 소설이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그 상처가 어떻게 세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임을 암시한다. 독자는 경하의 여정을 따라가며, 잊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죽은 자의 입으로 산 자의 삶을 이야기하다.
소설의 심장부는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목소리로 재구성되는 제주 4.3의 참혹한 기록에 있다. 한강 작가는 차마 언어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극한의 폭력과 고통을, 단정하면서도 심장을 저미는 듯한 특유의 문체로 되살려낸다. 정심의 가족이 겪는 비극은 제주 4.3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뿌리째 뒤흔들고 파괴해버린 구체적인 현실이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군경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는 마을 사람들, 눈앞에서 가족을 잃는 고통, 살아남기 위해 숨죽여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평생을 따라다니는 죄책감까지. 정심의 이야기는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개인의 생명이 얼마나 무참히 짓밟힐 수 있는지를 고발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언'이라는 행위 그 자체다. 정심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기록한다. 이는 단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행위를 넘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신성한 의무에 가깝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몸에 새김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녀의 증언을 읽는 경하, 그리고 경하를 통해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증언의 연쇄에 참여하게 된다.
한강 작가는 고통을 재현하는 데 있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폭력을 자극적으로 전시하기보다는, 그 폭력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얼굴과 그들을 잃은 이들의 슬픔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학살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시신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동생을 찾아 헤매는 정심의 절박한 심리를 따라가는 방식은 독자에게 더 깊고 본질적인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쉽거나 편안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독서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며, 『작별하지 않는다』가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끝내 작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남는다.
소설의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선언이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에게 보내는 산 자의 약속이며, 폭력적인 역사를 결코 잊거나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다. '작별'은 과거를 과거의 시간 속에 묻어두고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자는, 어찌 보면 합리적으로 들리는 사회적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러한 섣부른 화해와 망각이 얼마나 큰 기만인지를 이야기한다. 진정한 애도는 충분히 슬퍼하고, 기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현재로 불러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하는 정심의 기록을 모두 읽고 난 후, 마침내 인선이 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세대를 거쳐 이어진 고통의 기억은 너무나 무거워서, 때로는 살아있는 자의 몸에 상흔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하는 그 모든 고통의 기록을 물려받아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갈 것을 다짐한다. 인선의 새를 돌보는 행위는, 연약한 생명을 지키고 이어나가는 행위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겠다는 약속의 상징이 된다.
이 소설이 주는 울림은 제주 4.3이라는 특정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 세계 모든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상처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다. 역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한강 작가는 '함께 살아남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죽은 이들과 함께,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고 함께 살아남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들과 '작별하지 않는' 방법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제주 4.3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대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한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되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평생을 그리워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숭고한 문학적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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