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어둠과 상처 속, 빛을 향한 고요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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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시인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스러져가는 순간과 기억, 고통의 흔적을 섬세하고 투명한 언어로 붙잡아낸 작품입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삶의 가장 깊은 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서늘하고 아름다운 시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라지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가장 고요한 노력.

한강의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는 경험은, 해 질 녘의 방 안에 홀로 앉아 빛이 스러지고 어둠이 차오르는 풍경을 오랫동안 가만히 응시하는 행위와 닮아있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하나의 완벽한 시다. '저녁'이라는, 손으로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가장 추상적이고 찰나적인 순간을 '서랍'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에 '넣어 두는' 불가능한 행위.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서를 함축한다. 그것은 바로 소멸하는 것들, 흩어지는 순간들,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어떻게든 보존하고 간직하려는 필사적이고도 고요한 노력이다.
시집 속의 언어들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고 투명하다. 작가는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는 대신, 마치 사물의 표면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더듬는 듯한 섬세한 감각으로 세계를 묘사한다. '겨울 창문', '흰 그릇', '희미한 불빛', '차가운 뺨'과 같은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소리 내어 울지 않지만, 그 너머에 있는 깊은 슬픔과 고독, 시간의 무상함을 넌지시 비춘다. 한강의 시에서 침묵과 여백은 단어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텅 빈 공간들은 독자에게 사유의 시간을 허락하고, 언어가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가만히 느끼게 만든다.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우리가 평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는지 생각했다. 시인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가장 미세한 균열 속에서 삶의 본질적인 풍경을 발견해낸다. 저녁이 오는 것, 촛불이 타들어 가는 것, 누군가의 희미한 숨소리. 이처럼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향한 시인의 애틋한 시선은, 우리에게 시간의 유한성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연약함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이 시집은 거대한 서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한 줌의 빛과 어둠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장 사소하고도 가장 본질적인 삶의 순간들을 언어라는 서랍 속에 소중히 담아 우리에게 건넨다.

투명한 언어 속에 담긴 상처와 슬픔의 깊이.

한강의 문학 세계 전반을 흐르는 '고통'과 '상처'에 대한 탐구는 이 첫 시집에서도 그 원형을 뚜렷이 드러낸다. 다만 소설에서 나타나는 격렬하고 폭력적인 형태의 고통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마치 오래된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진물처럼, 조용하고 만성적인 슬픔의 형태로 존재한다. 시인은 아픈 몸, 병든 사람,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러나 그 응시에는 어떤 과장이나 감상도 없다. 마치 의사가 환부를 살피듯, 냉정할 정도로 침착하고 투명한 언어로 고통의 풍경을 그려낼 뿐이다. '몇 개의 가구처럼 네 병은 조용했고', '오래 앓은 사람의 이마에는 빛이 났다'와 같은 구절들은 고통을 미화하거나 대상화하는 대신, 그것이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방식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에게 독특한 형태의 위로를 준다. 세상이 강요하는 긍정의 에너지와 밝음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숨겨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한강의 시는 '아파도 괜찮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시집을 읽는 것은 마치 불 꺼진 방 안에서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또 다른 존재의 희미한 숨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그것은 요란한 위로보다 더 깊은 연대감과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또한 인간의 상처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연약한 것들을 향해 시선을 확장한다. 곧 부서질 것처럼 얇은 유리잔, 한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희미하게 타오르는 촛불. 이 모든 사물들은 시인의 눈을 통해 저마다의 슬픔과 사연을 가진 존재로 되살아난다.
이처럼 시집 전체에 흐르는 연민의 정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결국 상처받기 쉽고 유한한 존재라는 보편적인 진실에서 비롯된다. 한강의 투명한 언어는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그 안에 담긴 슬픔의 깊이를 더욱 선명하게 비춘다. 독자는 그 맑고 서늘한 언어의 강물에 자신의 상처를 조용히 비춰보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가장 희미하고 따뜻한 빛.

이 시집이 단지 슬픔과 어둠에 대한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그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아내려는 시인의 끈질긴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행위는 소멸에 대한 체념인 동시에, 그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를 간직하고 기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강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어쩌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내고, 그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종의 기도이자, 살아있음의 증거를 남기려는 필사적인 몸짓이다. 시집의 여러 편의 시에서 '촛불'이나 '희미한 빛'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거대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작고 연약한 빛 하나가 존재함으로써 공간의 윤곽이 드러나고 온기가 생겨나듯, 한강의 시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가장 희미한 희망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시인은 '오래된 약병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겼던 '캄캄한 액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복용하며 병과 싸웠을 누군가의 시간을 함께 떠올린다. 이는 고통의 흔적 속에서 삶을 향한 의지를 발견해내는 시인만의 따뜻한 시선이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가 '애도'라고 할 때, 그것은 결코 허무나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의 애도는 사라진 것들을 정성껏 호명하고, 그들의 자리를 마음속에 마련해주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러므로 이 시집을 읽고 난 후에 남는 감정은 단순히 우울함이 아니라, 슬픔을 통과한 후에 찾아오는 어떤 정화된 고요함과 가라앉은 온기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과 고통 또한 삶의 소중한 일부임을 일깨워준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별이 보이듯, 한강의 시는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섬세하게 비춤으로써,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희미하지만 분명한 삶의 의미들을 길어 올리게 만든다. 그것이 이 서늘하고 아름다운 시집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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